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올로고스 내전 (문단 편집) === 전개 === 1352년 여름, 요안니스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처남인 마세오스의 영역을 침범해 아드리아노플을 포위했다. 마세오스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요안니스 6세는 오르한 1세로부터 상당 규모의 튀르크 병력을 빌려서 아드리아노플로 파견했다. 이에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손을 빌렸고, 스테판 두샨은 이를 받아들여 기병 4천 명을 파견했다. 양측은 마리차 강에서 격돌했고, 튀르크군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튀르크군은 약탈 허가를 얻고 인근의 소도시와 촌락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이로 인해 요안니스 6세는 이겨놓고도 인기가 폭락하는 상황에 놓였다. 1353년 4월, 요안니스 6세는 요안니스 5세를 공식적으로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 마세오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대가 끊긴 것은 아니라면서 요안니스 5세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4세]]에게 상속권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가족을 테네도스 섬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총대주교 칼리스투스는 마세오스의 대관식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요안니스 6세를 파문한 뒤 총대주교 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엔 제노바 측의 도움을 받아 테네도스 섬으로 도주했다. 마세오스와 그의 아내 이리니는 1354년 2월에야 비로소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1354년 3월 2일, 트라키아에 대지진이 일어나 대부분의 지역이 파괴되었다. 수많은 도시와 촌락이 피해를 입었고 생존자들마저 그 뒤에 이어진 눈보라와 홍수로 인해 사망했다. 한때 대도시였던 갈리폴리는 거의 집 한 채도 남아있지 않은 폐허로 변했다. 튀르크군은 이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최대한 거느린 채 트라키아로 이주, 버려진 도시들에 터전을 잡았다. 대다수는 페허가 된 갈리폴리로 갔고, 곧이어 더 많은 튀르크인들이 그곳으로 가서 합류했다. 이리하여 제국은 트라키아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요안니스 6세는 튀르크 측에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으나 튀르크인 이주를 주도한 슐레이만 파샤는 알라의 뜻에 따라 도시를 점유한 것이니 제국에 넘겨주면 불경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이라며 묵살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요안니스 6세는 사위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테네도스 섬으로 갔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그가 탄 배를 받아주지 않았고 사위 역시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요안니스 6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무기력한 심정으로 사태의 변화를 지켜봤다. 1354년 11월 21일, 요안니스 5세는 테네도스 섬을 빠져나와 헬레스폰트를 빠르게 거슬러 가서 마르마라 해로 들어갔다. 11월 22일 이른 시각에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입성하는 데 성공하고 신속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날이 밝자 군중은 이미 거리에 나와 그의 이름을 외쳤고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다. 요안니스 6세의 집은 또다시 약탈과 방화를 당했고, 그의 지지자들이 사는 집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요안니스 5세는 소피아 대성당 맞은편의 옛 황궁을 임시 거처로 삼고 장인과 대치했다. 11월 24일, 요안니스 5세는 장인에게 사자를 보내 만나자고 제의했다. 이후 이어진 협상에서, 그는 장인에게 에전처럼 공동 황제로서 함께 제국을 다스리자고 제안했다. 요안니스 6세는 이에 따라 요안니스 5세를 공동 황제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은 요안니스 6세는 12월 10일 블라케르나이에서 제관을 내려놓고 황제만 착용하는 예복과 자주색 장화를 벗은 후 은퇴를 선언하고 수도원에 은거했다. 황후 [[이리니 아사니나]] 역시 황후복을 벗고 키리아 마르타 수녀원의 수녀가 되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에서 거점을 갖추고 있던 요안니스 6세의 맏아들 마세오스는 이에 불복하고 황제를 칭하며 매제인 요안니스 5세에게 맞섰다. 그러던 1356년 말 또는 1357년 초, 그는 세르비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인들이 내건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마세오스를 데려왔다. 이후 마세오스는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그의 아우 마누일이 있는 모레아로 갔다. 이렇게 해서 3차 내전이 막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